[신간 산책] 책 속에서 다시 찾은, 되살리는 목소리.. 신아영 '나의 작고 부드러운 세계'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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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산책] 책 속에서 다시 찾은, 되살리는 목소리.. 신아영 '나의 작고 부드러운 세계' 外

  • 손유지 press9437@gmail.com
  • 등록 2023.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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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고 부드러운 세계 - 활자들의 마을에서 만난 사소하지만 고귀한 것들 

신아영 지음, 책과이음 펴냄


‘돌아보면 나는 아프고 나서 알게 된 것이 무엇보다 많았다. 아파서 할 수 없었던 일만큼이나 아팠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들도 있었다. 무엇이 좋고 나쁘다고 단정 짓기 어려웠다. 모든 것들은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공동체적 연대 혹은 어울림에 주목한 저자는 이 책에서 본격적으로 지금의 ‘나’를 만들어낸 자기 안의 작은 세계를 탐험한다. 


그곳에는 잔반 검사에서 탈락해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후 수업이 시작된 뒤에도 혼자 식판을 들고 외로운 사투를 벌이고, 학교 복도와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통행 규칙을 자주 헷갈려 하던 어린 시절의 저자가 있다. 


막연히 외롭고 불안한 나날 속에서 어리고 서툴러서 타인에게 쉽게 상처를 주고 동시에 타인에게 자주 상처받곤 하던 어수룩한 모습의 아이가 있다. 


그 시절 작가를 기꺼이 보듬어 안아준 것은 바로 책이라는 '활자들의 마을'이었다. 책 속에 담긴 타인의 이야기는 순식간에 작가를 끌어당겼고, 수시로 찾아오는 불안을 압도할 만큼 설레고 가슴 뛰게 했다. 


책이 속삭이는 작고 낮은 소리는 무심결에 엉클어진 마음을 담담히 위로하고 새로운 용기를 심어주기도 했다. 비록 가슴 한쪽에 쌓인 고민이나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책 속에 담긴 이야기가 몸 안 어딘가에 들어왔다 나가면 신기하게도 살아갈 힘이 났다. 


원인 모를 신체적 통증으로 오랫동안 고통스러워할 때도, 아픈 몸을 치료하기 위해 엄격한 식단 조절을 하며 괴로워할 때도, 책은 작가에게 삶이란 무릇 그런 것이라는 걸 말없이 알려주었다. 그런 깨달음이 찾아오면 작가는 기쁘고 또 슬펐다. 


그렇게 매료된 작고 너른 세상에서, 언제부턴가 작가는 평생 책을 친구 삼아 살아갈 운명임을 깨달았다.


어떤 성장은 상실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고민하던 적이 있었다. 어른이 되는 대가로 많은 것들을 강제로 혹은 스스로 떠나보내야 하는 것이 작가는 슬펐다. 

 

‘자란다는 것’이란 이전에 좋아하던 것들을 떨쳐버리고 또 다른 세계로, 그렇게 어른의 나이에 맞는 것을 새롭게 좋아하는 일일 거라 믿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 때 문득 책 속의 세계가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여왔다. 작고 부드러운 것들의 속마음을 듣고 나누는 기쁨이 여기에 있다고. 어느 날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며, 문득 마음을 뒤흔든 작은 이야기를 곱씹으며, 작가는 비로소 깨달았다. 


책이라는 통로를 오가며 그간 잊고 지내온 세계를 자주 만나다 보면, 그 속에서 다양한 감정의 진폭을 느끼다 보면, 어린 시절 잃어버린 그 무언가를 조금씩 되찾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저자는 작가의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자꾸 떠오르는 것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자꾸만 불쑥불쑥 떠오르는 것들이, 접고 잊어버려야 할 지난 시절의 지나간 페이지가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에서 또 다른 이야기로,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전해져야 할 아름답고 고귀한 무엇이었음을 확신한다.


그 사소하지만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 자신을 힘 나게 하는 것이었음을. 저자는 자신이 사랑한 문장들처럼, 비로소 작고 부드러운 것들의 속마음을 듣고 나누는 기쁨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한 마디 설교나 잠언보다 한 편의 이야기로 단순하지 않은 삶의 진실을 만나고, 그렇게 자신의 세계를 조금씩 확장해 우연히 연결된 누군가와 더 자주 닿는 것이 지금의 작가에게는 더없이 기쁜 일이다. 


그러기에 저자는 오늘도 마을의 아이들과 어르신들을 만나 함께 읽고 함께 쓰고 함께 이야기 나누며 부지런히 사랑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저자는 우연히 읽은 다니엘 페나크의 책 속 한 구절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우리가 좋아하는 이와 나누는 것”이라 믿는다. 

 

이에 어느 책에서 시작된 작고 여린 문장의 속삭임은 이제는 결코 작지 않은 메아리가 돼 저자를 둘러싼 더 넓은 세상으로 되돌아가며 한줄기 아름다운 빛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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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김승섭 지음, 동아시아 펴냄


‘제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이미 생산되어 있는 지식만으로는 답할 수 없는 질문에 답해야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럴 때는 읽고 만나고 부대끼며 길을 찾으려 했습니다.’


이 책은 소수자의 건강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질문해 온 저자가 그간의 연구를 소개하는 공부의 기록이자, 그 과정에서 겪은 시행착오를 고백하는 분투의 기록이다.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 노동자 등 한국 사회에서 지워진 존재들의 고통에 구체적 데이터와 정확한 문장으로 응답하기 위해 그는 ‘읽고 만나고 부대끼며’ 막막한 상황에서도 길을 찾아 분투한다. 


책에는 과학의 이름으로 소수자에게 낙인을 부여했던 19세기 논문부터 국내 성소수자의 건강에 대한 최신 연구까지, 풍부한 학술 자료가 적재적소에 소개된다. 


데이비드 윌리엄스, 캐런 메싱 등 세계적 학자들과 김승섭이 만나 나눈 대화들은 한국 상황을 객관적 시각에서 돌아보게 하며, 그가 직접 촬영한 사진들은 현장감을 더한다.


저자는 ‘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질문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의 질문은 현실적 해결책만을 구하지도, 정치적 올바름만을 좇지도 않는다.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그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화장실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도 한국 여성에게 공중화장실은 불법 촬영과 폭력을 걱정해야 하는 불안한 공간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함께 지적한다. 


HIV 신규 감염을 줄일 보건정책을 논하면서도, 동시에 그 질병과 함께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감염인의 사회적 존엄을 지킬 길을 고민한다. 그가 말하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란 공기처럼 존재하는 차별을 정확한 데이터로 마주하고, 당사자의 고통을 함께 이야기하고, 문제의 복잡한 맥락을 헤아리는 모든 과정이다.


응급의학과 의사인 녹스 토드 박사 연구팀이 1993년 발표한 논문은 큰 논란을 일으킨다. 연구팀은 의료진의 진통제 처방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요인이 환자의 인종이었다는 결과를 보여줬다. 


긴뼈 골절로 응급실을 찾은 히스패닉 환자 중에서 진통제를 처방받지 않은 비율이, 백인 환자와 비교해 2배에 육박했던 것이다. 명시적으로는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의료진조차 이처럼 인종에 따른 ‘불평등한 치료’를 한 것은 무의식에 내재된 ‘암묵적 편견’ 탓이다. 


문제는 암묵적 편견이 실제 차별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소수자의 몸을 아프게 한다는 점이다. 부정적 시선을 보내는 사람과의 관계가 여러 질병을 유발하는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한국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어떤 이들은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한다. 2020년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출생 시 법적 성별과 외모에 드러나는 성별 정체성이 다른 트랜스젠더 5명 중 1명은 신분증을 제시해야 하는 상황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을까 두려워 병원 이용을 포기한 적 있다고 응답했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들은 많은 경우, 운전기사나 승객들의 따가운 시선이 두려워 대중교통 이용을 포기한다. 저자는 한국 사회가 종종 암묵적 편견을 넘어 명시적 편견을 드러낸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2018년 내전을 피해 제주도에 온 예멘인 484명에 대한 난민 수용 논란에서 많은 호응을 얻은 주장은 이들이 ‘범죄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명시적 편견에 호소하는 목소리였다.


저자는 차별을 연구하는 과정에도 차별이 존재한다고, 모든 고통이 동등하게 주목받지는 않는다고 고백한다. 그는 연구에 참여한 보상으로 지급한 기프티콘에 있는 ‘트랜스젠더 연구’라는 말이 아웃팅이 될 수도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후 장애인 이동권 연구에서 같은 실수를 피했지만, 휠체어를 사용하는 동료에게 편의점 기프티콘을 받아도 직접 사용하기 힘들다는 말을 들었다는 일화는 ‘차별은 공기처럼 존재한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한다. 


한편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연구를 처음 진행했던 2015년 당시 연구자인 자신조차 해고 노동자의 아내를 ‘고통의 당사자’로 생각하지 못했다는 성찰은 후속 연구와 백화점·면세점 여성 노동자의 ‘보이지 않는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로 이어진다.


2022년 여름, 기록적인 폭우로 인해 서울시 신림동 반지하방에서 3명이 숨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틀 뒤 서울시는 지하·반지하 주거를 금지하겠다는 ‘안전대책’을 발표했다. 반지하방에서 살 수밖에 없는 당사자의 복잡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결정이었다. 


저자는 세월호 참사 당시 ‘해경 폐지’를 연상시키는 이런 성급한 해결책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반면 1988년 미국 뉴욕시는 당사자의 삶을 중심에 놓고 이른바 ‘주삿바늘 교환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HIV 신규 감염을 줄이기 위해 사회적 낙인에 굴하지 않고 마약중독자들에게 깨끗한 주삿바늘을 무상 제공한 것이다. 이 정책은 곧바로 커다란 논란을 일으키지만, 결과적으로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성과를 거둔다.


HIV 감염인 낙인을 연구하는 보건학자 돈 오페라리오는 저자와의 대담에서 ‘보건학적 개입은 개인의 삶에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약중독에 대한 가치판단에 앞서 당장 생명을 지킬 길을 찾은 주삿바늘 프로그램처럼 말이다. 


그러나 ‘죽음보다는 삶이 낫다’는 보건학의 대전제 앞에서, 저자는 한 걸음 더 들어가 이렇게 질문한다. ‘과연 모든 개인에게서 죽음보다 삶이 나은 것일까?’ ‘치유’되지 못하는 질병을 가진 이들은 내내 그 멍에 속에서 허우적대야 하는가. 그 질문은 곧 한국 사회에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필요하다는 논의로 이어진다. 모든 소수자가 두려움 없이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세상, 그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직업병 피해자, 성폭력 생존자, 성소수자와 관련된 소송에서 전문가 소견서를 쓰거나 법정 증언을 했던 경험을 소개한다. 그때마다 상대측 대형 로펌 변호사들은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마련하고, 우아한 얼굴로 합리적 주장을 펼치며 종종 승소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자신이 살아온 고된 역사와 몸 깊숙이 새겨진 상처 말고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갖지 못한다. 그는 그러한 조건 위에서 합리성과 억지를 구분하는 ‘합리적인’ 기준은 무엇이어야 할지 묻는다. 


사회적 합의라는 ‘합리적’ 근거를 이유로 차별금지법을 ‘나중에’ 처리할 일로 치부하는 한국 사회에서, 과학적 합리성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했을 연구자의 질문은 큰 울림을 준다.


책에서 저자는 2018년 미투 운동을 촉발한 서지현 검사, 용산참사 피해자들이 겪는 개별적 고통을 포착한 영화 '공동정범'의 김일란 감독을 만난다. 대담을 나누는 데이비드 윌리엄스, 패트릭 코리건, 리 배지트는 각각 인종차별, 정신질환 낙인, 성소수자 혐오를 겪은 당사자들이기도 하다. 


이들이 일관되게 말하는 것은 피해자나 소수자에게도 저마다의 고유한 역사와 욕망이 있고, 다양한 정체성이 있다는 점이다. 서지현 검사는 ‘피해자야말로 행복해져야 할 사람’이라고 말하며 한국 사회에서 요구하는 전형적인 피해자다움을 거부한다. 김일란 감독은 우리가 아는 ‘피해자의 모습은 일부분’이라며 피해자들이 지닌 입체적 면모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점에서 헬렌 켈러의 이야기를 주목할 만하다. 헬렌 켈러의 삶에는 빛나는 성취뿐 아니라 시대적 한계와 모순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저자는 헬렌 켈러가 이룬 성과뿐 아니라, 한계와 모순을 함께 본다고 해서 그녀의 삶을 폄하할 이유는 없다며 오히려 ‘장애를 극복한’ 박제된 영웅보다, 오류와 모순을 품고 당대를 살아낸 한 인간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길 원한다”라고 말한다. 


저자가 이번 책에서 연구 중에 느낀 서운함이나 고충을 스스럼없이 고백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이는 ‘앞뒤 맥락을 잘라낸 채 몇 마디 말을 인용하며 사람과 사건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는 일이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시대에’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를 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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