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페미노트] 그 행복한 삶, 난 정말 괴로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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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페미노트] 그 행복한 삶, 난 정말 괴로웠네
  • 홍성민(출판기획자)
  • 승인 2019.06.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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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MeToo·나도 피해자다)로 촉발된 페미니즘 열풍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페미니즘을 둘러싼 논쟁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지만, 페미니즘의 정확한 의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특질을 갖추고 있는 것'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페미나(femina)'에서 파생한 말이다. 성 차별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시각 때문에 여성이 억압받는 현실에 저항하는 여성해방 이데올로기를 의미한다. 알들 모를듯 세계적인 이슈로 부상한 페미니즘은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페미니즘은 하나의 총체적인 사상의 형식과 체계로 묶을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인 실체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페미니즘을 달고 어느 순간부터 책들이 쏟아지고 있는 지금, 지데일리는 페미니즘의 이해를 돕는 책을 소개한다.

여성의 임금은 남성보다 낮고, 임신과 출산을 하면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 가까스로 자신의 커리어를 이어가는 소수의 여성에게 사람들은 집에서 엄마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묻는다.

익숙한 이야기지만 이는 지금 한국의 이야기가 아니다. 1963년에 출간된 <여성성의 신화>에 실린 사례들이다. 프리랜서 기자이자 가정주부였던 베티 프리단은 교외의 크고 멋진 저택에서 네댓 명의 아이를 기르고 남편을 내조하며, 세간의 인식대로라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야 할 주부들이 왜 불행하다고 느끼는지 의문을 가졌다.

스미스대학 동창생들의 설문조사를 시작으로 고등학생과 대학생, 기혼 여성들을 심도 깊게 인터뷰하고, 미국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친 잡지와 광고, 심리학 저서들을 분석하면서 베티 프리단은 사회가 여성들을 어떻게 억압하고 있는지 밝혀냈다.

방대한 연구를 통해 여성들이 겪는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을 처음으로 밝혀내고 소비주의의 해악을 선구적으로 지적한 이 책은 ‘여성성’이라는 이미지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여성에게 부과되는지 이야기했다. 

유능하고 고학력인 여성이라도 하이힐을 신은 재생산 기관으로만 간주하는 사회 때문에 여성들은 업무 능력과는 별개로 외모를 가꾸는 일에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압박을 받으며, 다이어트 산업과 미용 산업은 나날이 커져가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여성들은 남성의 지위를 위협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받는다. 여자친구의 학업적 성공이 자신을 위협한다고 느낀 남자친구 때문에 대학원 진학을 포기한 베티 프리단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워킹맘들은 자신이 일을 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엄마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죄책감을 느낀다. ‘여성다운 여성’을 사회가 아무리 찬양한다 하더라도, 여성들은 그 ‘여성다움’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베티 프리단은 미국의 많은 여성들이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하며, 그 문제는 당시 미국에 만연해 있던 허구의 이미지, 여성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기르고 남편을 내조하면서 만족을 느낀다는 통념과 여성의 실제 현실과의 괴리 때문이라고 말한다.

남성 중심적인 학계와 매스미디어가 주입한 ‘여성성’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여성들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인생 여정 외의 다른 미래를 상상하지 못했고, 학업을 이어가거나 직업을 가지는 일 없이 이른 나이에 결혼해 가정주부로 살았다.

주부이자 어머니로서 사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배운 여성들은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집안일을 하고 자식과 남편을 뒷받침하는 삶을 살면서 괴로워했다. 이에 대해 베티 프리단은 사회가 여성을 누군가의 성적 대상물이자 인구 재생산 도구로만 여겨지도록, 인간이기 이전에 ‘여성’으로 살게 교육시켰다고 말한다.

대부분 남자로 이뤄진 여성 잡지 편집자들은 이상적인 ‘여성상’으로서 행복한 가정주부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전파했으며, 기업들은 여성들이 집안일에 더 힘써서 가전제품을 더 많이 사도록 광고를 통해 이미지를 조작했다. 프로이트의 여성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마거릿 미드의 기능주의적 관점을 잘못 받아들인 결과 여성의 이미지는 협소해지고 말았다.

교육자들은 이러한 이미지가 ‘정상적인 여성상’이라고 말하며 여학생들이 천체를 관찰하거나 새로운 과학 기술을 개발하는 대신 좋은 아내와 어머니가 되도록 교육했다. 이에 여성들은 자신의 능력을 부정하고 다양한 삶의 기회를 스스로 제한하게 됐다는 것이다.

프리단은 여성의 역할을 가정 내에만 국한시키는 사회를 비판하고, 여성은 누군가의 성적 대상물이자 어머니로서만 존재할 수 없으며, 남편이나 아들을 통해 삶의 목적을 이루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성취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에게는 다양한 여성의 자화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1978년 한국에 처음 소개될 당시 <여성의 신비>라는 제목으로 출간돼 널리 알려졌으나 이 제목이 ‘여성다움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에게 덧씌워진 역할과 이미지’라는 의미를 제대로 담지 못한다고 판단해 ‘여성성의 신화’로 수정됐며, 일부 누락됐던 본문을 되살리고 오역을 바로잡기 위해 재번역됐다. 

이 책이 출간되고 나서 5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늘었고 이제 성차별은 예전만큼 심하지 않다고들 이야기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한국의 여성 교육 수준은 세계 1위인 반면, 노동시장 진출의 질은 104위다. 여성의 임금은 남성보다 38~42퍼센트 정도 적다.

교육 수준과 취업의 괴리는 고학력 여성을 결혼 시장으로 내몰고, 여성들을 자녀 교육에 올인하게 한다. 고학력 중산층 여성들이 가정에서 자아를 실현하려 한다면, 한편에서는 비혼을 선언하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 자기 계발과 스펙 쌓기에 지친 여성들은 ‘고양이, 알바, 여행’으로 상징되는 ‘소박한 삶’을 원하고 SNS를 통해 자아를 구성한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논픽션이자 앨빈 토플러가 “역사의 방아쇠를 당긴 책”이라고 평한 이 책은 여성 참정권 운동 이후 잠들어 있던 페미니즘을 부활시킨 책으로 평가받는다.

미국에서만 300만 부가 넘는 판매량을 기록했으며, 직장에서의 성차별 폐지와 임신중단권 운동, 여성에 대한 폭력 반대 운동, 여성의 권리 향상 운동 등을 펼친 2세대 페미니즘을 촉발시키기도 했다. 프리단은 미국 최대 여성단체인 전미여성기구 NOW를 조직해 미국의 페미니즘 운동을 이끌었다.

이제 성평등을 향한 돌아갈 수 없는 길에 선 지금. 여성이 알 수 없는 문제로 괴로워할 때 그 문제에 이름을 붙이고 여권을 위해 싸워온 프리단의 이야기는 한국 사회에 큰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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