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손엔 바늘, 다른 손엔 목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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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엔 바늘, 다른 손엔 목숨

  • 한주연 gdaily4u@gmail.com
  • 등록 2019.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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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수용소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수용소

나치 국가는 왜 전쟁 기간에 그 많은 곤란과 비용을 무릅쓰면서까지 유대인들을 샅샅이 찾아내어 박멸하려고 애쓴 것일까. 수많은 역사가들이 여기에 매달리고 있지만, 홀로코스트의 전모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홀로코스트가 왜 일어났는지, 어떻게 시작됐는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

가장 극악무도했던 것은 독일이 소련을 침략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인 1941년 7월 10일 예드바브네의 폴란드 주민들이 이웃에 살던 유대인 1600여명을 거의 몰살시킨 사건이었다. 독일인들은 이 광경을 선전용 카메라에 담으면서 그저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폴란드 마을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도끼, 막대, 칼, 그리고 대못이 박힌 곤봉으로 살해했다. 남자들은 혀가 잘리거나 눈이 파헤쳐졌고, 여자들은 강간 살해됐으며, 어린이들은 땅에 내동댕이쳐져 짓밟혀 죽었다.  잔인한 구타 속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을 폴란드인은 모두 근처 헛간으로 몰아넣고는 기름을 끼얹어 산 채로 불태워 죽였다.

홀로코스트는 한 강력한 국가가 체계적이고 치밀한 정책 아래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써서 유대인 전부를 몰살시키고자 했다는 점에서, 다른 인종 학살과 비교할 때 그 유례를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독일인들은 유럽에서 이러한 극악무도한 목표를 거의 달성하는 듯싶었으나, 군사적으로 패배해 결국 그 끔찍스런 마무리를 짓지 못했을 따름이었다.

“나는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의 팔에 문신을 새겨주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슬로바키아 출신의 유대인 랄레 소콜로프는 1942년 24세의 나이에 자신이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르는 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했다. 이후 그곳에서 수용자들에게 문신 새기는 일을 맡게 됐다. 그의 동료이자 민족인 희생자 수천 명의 팔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잉크로 유대인 대학살의 상징을 남기는 일이었다. 이는 오직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아우슈비츠의 비르케나우 수용소는 유대인 대학살을 위해 설립된 가장 악명 높은 곳이다. 지옥 중의 지옥이라 할 수 있는 이곳에 여인들이 호송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당시 아우슈비츠의 문신가였던 랄레는 여인들의 팔에 문신 새기는 일만은 결코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겁에 질린 채 몸을 떨며 문신을 새기려고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는 한 어린 소녀가 있었다. 랄레는 그녀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다. 그리고 자신만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이 소녀의 목숨도 책임지겠다고 결심했다. 이렇게 하여 홀로코스트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희망과 용기를 찾아가는 위대한 휴머니즘의 여정이 시작된다. 바로 아우슈비츠의 문신가가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다.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죽음을 각오해야 했기에, 그는 자신에게 건네주는 쪽지를 묵묵히 받아들었다. 그리고 여인의 팔을 잡고 바늘을 찔러 숫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피가 새어 나왔고 여인이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랄레는 여인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신호를 보냈다. “쉬잇.” 그리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본 순간,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바로 이 격정의 순간부터 그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북로드
ⓒ북로드


'트럭이 죄수 호송차처럼 보이는 승합차 옆에 멈춰 선다. 벙커처럼 개조한 이 승합차의 창문들에는 창틀을 가로질러 강철판을 박아놓았다. 랄레는 발가벗은 사내 수십 명이 지시에 따라 트럭에서 내려 승합차로 향하는 광경을 지켜본다. 어떤 이들은 고분고분 들어간다. 어떤 이들은 저항하다 소총 개머리판으로 얻어맞는다. 정신이 혼미해진 이 저항자들을 동료 수용자들이 운명의 장으로 끌고 간다.

차에 비해 인원이 너무 많은 탓에 몇몇 사람들은 발뒤꿈치를 들고 계단에 매달린다. 맨살의 엉덩이가 문 밖으로 나와 있다. 장교들이 힘을 실어 그들을 밀어 넣는다. 이윽고 문이 닫힌다. 장교 한 명이 승합차를 빙 돌며 칠판들을 두드려보고 이상이 없는지 확인한다. 날렵한 장교 한명이 손에 산탄통을 들고 차의 지붕 위로 올라간다. 랄레는 움직일 수가 없다. 장교가 지붕의 작은 들창문을 열더니 산탄통을 거꾸로 뒤집는다. 그런 뒤 다시 들창문을 닫고 걸쇠를 채운다. 그가 황급히 내려가자 차체가 격렬하게 흔들리며 아득한 비명 소리가 들린다. 랄레는 털썩 무릎을 꿇고 속을 게운다. 그가 흙밭에서 구토하는 사이 비명 소리가 희미해진다.

승합차가 잠잠해지고 고요해지자 문이 열린다. 죽은 사내들이 돌덩이처럼 쏟아져 내린다. 행정동 반대편 모퉁이에서 수용자 한 무리가 나온다 트럭이 후진하자 수용자들은 시체들을 트럭에 싣기 시작한다. 묵직한 몸뚱이를 들고 휘청거리며 애써 괴로운 마음을 숨긴다. 랄레는 상상할 수도 없는 행위를 목격했다. 그는 비틀비틀 일어나 지옥의 문턱에 선다.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일어나지 못한다.'(47~48쪽)
 

랄레와 그의 연인 기타는 도처에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는 악몽 같은 시대를 살았음에도 언젠가는 서로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내일이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3년이란 고난의 세월을 견뎌냈다. <아우슈비츠의 문신가>는 극한의 상황에서 피어난 두 사람의 사랑이 마침내 결실을 하기까지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

가혹한 시대에 태어나 자유뿐만 아니라 이름, 신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마저 빼앗겼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두 사람의 삶과 사랑은 인간의 생존을 향한 능력에 대한 뛰어난 이해와 인간 정신의 승리를 보여줬다.

“아침에 깨어나면 그것만으로도 그날은 좋은 날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랄레 소콜로프의 삶에 대한 열정이다. 그는 자신과 동료 수용자들에게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파악하고 끝까지 살아남기로, 가능하다면 온전한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랄레는 운 좋게도 수용소에서 특별한 보직을 부여받았다. 바로 문신가를 의미하는 ‘테토비러’라는 보직이었다.

그는 침대가 있는 방을 홀로 썼고, 식사도 나치 수준으로 제공받았다. 이른바 '앞잡이'임에도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과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다.

일반 친위대 소속이었기에 약간의 자유가 허용됐던 그는 살해당한 유대인의 돈과 보석을 구해, 이를 음식과 교환해 수용자들에게 나눠줬다. 다음 날 교수형의 위기에 처한 청년을 몰래 빼돌리기도 했다. 발각되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도움으로 많은 수용자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2003년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던 헤더 모리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가졌다’는 한 노신사를 소개받았다. 그리고 2006년 그의 사망 소식을 접하기까지 3년이란 세월 동안 한 주에 두세 번씩 노신사와 시간을 보내며 특별한 우정을 쌓아왔다.

1942년부터 1945년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해방되기까지 동족의 팔에 문신 새기는 일을 했던 랄레는 결코 자신의 경험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나치의 협력자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2003년 아내 기타의 죽음은 그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그는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그 이야기가 기록되길 원했다. 

극한의 상황에서 최고의 휴머니티를 보여주는 그의 강렬한 이야기에 사로잡힌 헤더 모리스는 원래 그의 이야기를 시나리오 각본으로 집필했다. 이 각본은 한 영화사에 채택되었고 몇몇 각본상을 수상했지만 끝내 영화화로 이어지진 못했다.

하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작가는 랄레의 이야기를 소설화해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겠다는 생각에, 크라우드 펀딩 서비스인 킥스타터에서 후원자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출판 에디터를 만나며 마침내 소설이 출간될 수 있었다. 

아우슈비츠의 문신가이자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였던 랄레 소콜로프의 실제 삶을 바탕으로 쓰여진 이 소설은 극한의 상황에서 꽃피는 인간 정신과 사랑의 힘에 대한 증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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