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하나 굳건한 약속 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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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하나 굳건한 약속 30년

  • 한주연 gdaily4u@gmail.com
  • 등록 2017.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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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일어난 민주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은 한국 근현대사의 전환점이었다. 보건의료 분야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바로 그 물결 속에서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가 탄생했다.

/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제공

인의협은 1987년 이후 쏟아져 나온 산업재해와 같은 노동자 건강권 문제, 의문사·국가 폭력 진상규명과 같은 민주주의 문제를 비롯해 반핵과 같은 환경문제, 건강보험 일원화·의약분업과 같은 의료 제도 문제, 공공의료·보장성 강화·의료 민영화 저지와 같은 국민 건강권 문제, 반전·미군 기지·사드와 같은 제국주의 문제, 노숙인 진료·북한 어린이 의약품 보내기 운동과 같은 인도주의 문제 등 의학이라는 수단을 가지고 접근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사안에 개입했고 나름대로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다. 물론 인의협과 인의협의 활동이 지닌 의미에 대한 판단은 역사의 몫이다.

 

'인의협은 1987년 민주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의 산물이었다. 그 열기가 남아 있었던 만큼 초창기 인의협 활동은 민주주의와 노동자·민중을 향해 집중되었다. 즉 민주주의를 외치다 군홧발에 짓밟힌 억울한 죽음, 경제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자신의 몸을 독성물질에 노출시켜야 했던 노동자,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아 병원 한 번 가보지 못했던 가난한 민중, 이들의 부름에 인의협은 기꺼이 응했다.'(52쪽)

 

<광장에 선 의사들>은 1987년 탄생해 올해로 꼭 30주년을 맞는 의사 단체,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가 어떻게 탄생했으며 어떤 이유에서 무슨 활동을 했는지 등 그간의 역사를 정리한 것이다.

하지만 인의협이 1987년 이후 벌어진 한국 보건의료 운동 대부분의 사안에 관여했고 그중 적지 않은 부분을 앞장서 이끌었던 만큼, 이 책은 한국 현대 보건의료 운동의 주요 궤적을 짚어 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인의협 활동의 자취와 성과가 선명함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는 물론 의사 사회에서도 제대로 조명된 적이 없는 만큼 보다 적극적으로 설명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인의협 탄생 이전에 존재했던,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의사들이 주도한 진보적 보건의료 운동’을 살펴본다. 그들의 역사가 인의협의 전사(前史)는 아니지만 이를 통해 인의협의 역사적 좌표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이후에는 이승만 정권부터 시작해 대체로 각 정권을 기준으로 인의협의 활동을 상세하게 보여준다. 이는 인의협이 사회와 유기적으로 움직였으며 시대에 조응한 각 운동과 인의협의 활동을 함께 돌아보고자 하기 위해서다.

 

'의약분업과 의보 통합을 둘러싼 보건의료 분야의 진보와 보수 세력의 대립은 2002년 대통령 선거로 일단락되었다. 국민들은 민간 의료보험도입 등의 노골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운 한나라당보다 의료보장률 80퍼센트로 강화, 공공의료 비율 30퍼센트로 강화를 내세운 노무현 정부를 선택했으며,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을 내세운 민주노동당에도 100만에 가까운 표를 몰아주었다. 그 후 총선에서도 한나라당이 패배하고 민주노동당이 최초로 10석을 얻는 정치 지형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의 공약인 의료보장성 강화와 공공의료 강화는 크게 진전되지 못했다. 기대에 못 미쳤을 뿐 아니라 오히려 공공 부문 민영화, 이라크 파병, 한미 FTA 추진 등 노골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이 추진되었다. 인의협은 이미 김대중 정부 때부터 민주당 정부에 대해 상당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에 대해서는 초기부터 더욱 분명하게 비판을 가했다.'(170쪽)

'예상했던 대로 박근혜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아니 사실상 당선되자마자 민생과 복지는 폐기되었다. 대표 공약이었던 ‘4대 중증 질환 100퍼센트 국가 책임’의 경우만 보더라도 이미 인수위 때부터 비급여 제외를 천명했고, 출범 후 간병비·선택진료비·차등병실료 같은 핵심 비급여는 완전히 제외한 채 일부만 별도로 보장성 강화를 논의하는 수준으로 전락했다. 또 다른 핵심 복지 공약이었던 기초노령연금도 누더기가 되었다. 그렇게 치워진 민생과 복지의 자리에는 각종 민영화 정책이 빠르게 자리를 잡았고 그 중심부에 의료 민영화 정책이 똬리를 틀었다. 인의협은 박근혜 정권 내내 바삐 움직여야 했다. 의료 민영화도 큰문제였지만 인의협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예상치 못한 사건 사고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인의협은 진주의료원 폐원, 의료 민영화 정책, 세월호 사건, 메르스 사태, 백남기 농민 사망 사건, 국정농단 사태 속 의료 게이트 등 각종 사안에 적극적으로 결합했다. 그리고 그 노력은 1987년 이후 가장 거대한 변화의 동력이라고 하는 탄핵촛불을 일으키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232쪽)

광장에 선 의사들ㅣ최규진ㅣ이데아
광장에 선 의사들ㅣ최규진ㅣ이데아

 

자신이 속한 사회의 건강을 고민하는 것은 의사의 사명이고 그것을 도모하기 위해 인의협이 존재하는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의사들에 의해 실현 가능한 문제는 아니다.
 
즉 이 책에는 많은 투쟁들이 기술되었지만, 그 투쟁들은 수많은 보건의료인들과 노동자들의 연대 그리고 역사의 주체인 민중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인의협의 모든 실천은 그 연대와 힘을 바탕으로 진행된 것이다.
 
한국 사회는 이제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다. 사회와 유기적으로 움직여 온 만큼 인의협 역시 그 변화의 흐름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 그 전환의 시기에 어떤 기획을 하고, 어떤 실천을 할지 많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