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보세 365] 성추행은 했지만 죄는 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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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보세 365] 성추행은 했지만 죄는 짓지 않았다?

  • 정용진 gdaily4u@gmail.com
  • 등록 2017.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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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대 학생은 훌륭한 사람이라는 공식이 성립되고 부와 권력, 그리고 명예는 누구보다 쉽게 얻을 수 있다. 그 결과 학벌에 따른 차별은 자연스러워졌으며 사람들은 이 차별이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이처럼 우리는 똑똑함을 숭배한다.

그러나 학벌주의는 고등학생도 모자라 초등학생까지 치열한 경쟁 사회로 내몰았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경쟁은 곧 사교육 문제를 양산했고 그 결과 부모의 경제력은 자녀의 명문대 진학률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됐다.

이제는 입시를 넘어 취업까지 부모의 경제력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부모의 돈도 실력이라는 말 앞에 우리가 자조의 웃음을 던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직장 내 성차별은 또 어떠한가. 사기업, 공기업에 관계없이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자이며 임금도 성별에 따라 차이가 난다. 여성이기 때문에 승진에서 제외된다고 하면 불평등이라 생각하지만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이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부의 세습화와 빈부격차, 성별에 따른 임금격차와 유리천장, 학벌주의 등 사회의 불평등은 모두 능력주의 아래에서 용인된다. 능력에 따른 보상의 유무는 합당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똑똑함을 신봉하고 능력주의를 추구하는 사회는 실패했다. 지난 10년 간 미국에서 벌어진 일들을 이를 대변해준다.

금융위기, 이라크 전쟁, 뉴올리언스 사태, 가톨릭교회 내 신부들의 아동성추행 사건들로 미국 정부와 언론은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

미국의 진보 시사평론가인 저자 크리스토퍼 헤이즈는 이 상황을 빚어낸 것이 넘쳐나는 정보나 언론의 부패가 아닌, 엘리트의 실패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그들이 더 이상 믿지 못할 사람임이 드러났기 때문인 것이다.

저자는 엘리트를 편애하면서도 엘리트 때문에 위기에 처한 미국의 모습을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그려낸다.

우리가 믿는 것은 능력주의가 아니라 능력주의의 신화다. 엘리트 계층은 이 신화를 이용해 자신들의 부정부패를 용인해왔다. 잇따른 부정행위로 벌어진 것이 바로 엔론 사태 그리고 리먼 브라더스 사태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벌어진 금융위기다.

똑똑한 사람들이니 틀릴 일이 없다는 믿음만 가지고 우리는 그들에게 많은 지위를 부여했다. 하지만 그 오만함으로 엘리트들은 자신의 행동이 모두 정답이라고 생각했으며, 능력주의에 뒤따르는 성과급 때문에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은 채 부정을 당당히 저질러 나라를 위기에 빠트렸다.

심지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대중이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렸을 때 범죄의 주범이었던 경영진들이 벌인 성과급 파티는 능력주의 사회의 폐해를 가장 잘 보여준 일이었다.

보상을 위한 부정은 스포츠계에서도 만연했다. 메이저리그 내에서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던 불법 약물 복용 문제가 그렇다. 이는 우리나라 축구계와 야구계 내의 승부 조작을 떠올리게 한다. 막대한 보상을 위해 집단의 합의 하에 부정행위가 묵인된 사건은 대중에게 충격을 주었고 남은 것은 대중에게 뿌리 깊이 내린 불신의 싹이었다.

엘리트주의는 엘리트와 대중 간의 사회적 거리감을 넓혀 엘리트 계층을 대중이 닿을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에 대처했던 교회의 태도가 이를 잘 보여준다. 교회 당국은 피해자인 신자들이 아니라 가해자인 사제들에게 공감하며 그들의 범죄 행위를 덮어주었다. 결국 이러한 태도는 교회가 그들의 어린 양을 저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렇듯 똑똑함과 능력주의를 숭배하는 사회는 민주주의에 위배되는 사회를 만들어 버린다. 권력을 쥔 소수의 엘리트 때문에 다수의 대중이 오히려 소수가 되고, 그 결과 힘없는 사람이 책임을 지고 힘있는 사람이 용서를 받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

「똑독함의 숭배」 크리스토퍼 헤이즈(갈라파고스)
「똑독함의 숭배」 크리스토퍼 헤이즈(갈라파고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우리 사회를 뒤흔드는 위기는 거듭될 것이고 시스템은 결국 붕괴하고 말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미 부와 계급의 세습화가 자연스러우며 정부의 무능, 정경유착, 부패한 언론 등 미국이 겪은 실패의 수순을 그대로 밟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똑똑하고 능력 있는 엘리트가 나타나 사회를 구원해줄 것이라 믿는다.

그렇지만 이제는 능력주의라는 종교에서 벗어나 새로운 대안을 찾아 획기적이고 참신한 해답을 제시해야 할 때다. 성취의 차이를 자연스럽고 바람직하게 받아들이는 능력주의는 불평등을 해소하지 못하며 오히려 불평등을 조장한다.

실패의 시대에 대해 저자가 제안하는 해법은 단순하면서도 날카롭다. 바로 결과의 평등이다. 능력주의로 인해 조장된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해 저자는 시작의 평등함뿐 아니라 결과의 평등함도 중요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는 능력주의라는 원칙으로 사회를 운영하더라도 그 간극이 너무 벌어지지 않게 조절하자는 것이다. 능력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조절이 능력주의의 정신을 해친다며 반대하겠지만, 생각해보면 결과의 평등은 지극히 당연한 주장이다.

기회의 평등이 결과의 평등을 보장하지 않을뿐더러 부의 세습화로 이미 계급에 따라 소득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회를 더욱 평평한 경기장으로 만들기 위해 매우 구체적이면서 획기적인 제도의 개혁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