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신념의 97년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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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신념의 97년 잠들다

이희호 여사가 숙환으로 별세했다. 이 여사는 남편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지난 2009년 서거할 때까지 47년간 '고난과 영광의 회전무대'를 살아왔다. 김 전 대통령이 옥고를 치를 때는 옥바라지로, 미국 망명 때는 후견인으로, 가택연금 때는 동지로, 야당 총재 시절에는 조언자로서 김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에 있어 언제나 든든한 동반자였다.?

  • 최준형 gdaily4u@gmail.com
  • 등록 2019.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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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희호 여사.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고 이희호 여사.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이자 인생의 반려자였던 이희호 여사가 10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7세.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과 함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오면서 인생의 고락을 함께 해왔던 야권의 대모로 불린다.

1922년 유복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난 이 여사는 이화여전 문과와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한 뒤 미국 유학을 다녀와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하는 등 당시 여성으로선 보기 힘든 인텔리였다. 대한여자청년단(YWCA) 총무 등 1세대 여성운동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이 여사가 2세 연하의 김 전 대통령과 처음 만난 것은 1951년 피란지 부산에서였다. 당시 전쟁통에 지인의 소개로 김 전 대통령을 몇 차례 대면했던 이 여사는 10년 뒤 첫 부인과 사별한 김 전 대통령을 우연히 다시 만나 1962년 운명적인 결혼에 이르게 된다.

이 여사는 당시 김 전 대통령이 계속된 출마와 낙선으로 빈털터리 정치적 낭인에 불과했지만, 가족과 주변의 반대를 뿌리치고 김 전 대통령과의 결혼을 선택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과의 결혼에 대해 "꿈이 큰 남자의 밑거름이 되자고 결심하고 선택한 결혼"이라고 소회한 바 있다.  

이 여사는 이후 지난 2009년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할 때까지 47년간 '고난과 영광의 회전무대'를 살아왔다. 김 전 대통령이 옥고를 치를 때는 옥바라지로, 미국 망명 때는 후견인으로, 가택연금 때는 동지로, 야당 총재 시절에는 조언자로서 김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에 있어 언제나 든든한 동반자였다.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이 진주교도소에 구금되자 이 여사는 진주와 서울에서 일주일씩 지내며 남편 곁을 지켰다. 면회는 한 달에 한 번밖에 안 됐지만, 가족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 힘든 투옥 생활을 하는 남편에게 위로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이 여사는 수감 중인 남편에게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편지를 썼다고 한다. 겨울에도 안방에 불을 넣지 못하게 했다. 유난히 추위를 타는 남편이 영하의 감방에서 떨고 있는데 혼자서 따뜻하게 지낼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내란음모 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이 사형 판결을 받았을 때는 지미 카터 미 대통령에게 구명을 청원하는 편지를 보내는 등 국제사회를 향해 구명운동을 벌였고, 각종 선거 때는 전국을 누비며 헌신적으로 지원유세에 나섰다.

이 여사는 청와대에 입성해 안주인이 된 뒤에는 여성과 아동 인권 신장에 심혈을 기울였다. 국민의 정부에서 여성부가 신설되고 여성의 공직 진출이 확대된 데 대해 "이희호 여사의 역할이 컸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이 정치인으로서 정상에 오른 뒤에도 이 여사의 시련은 계속됐다. '홍삼 트리오'라고 이름 붙여진 아들들의 비리 문제였다. 이 여사는 2002년 자신의 유일한 친자인 3남 홍걸씨에 이어 차남 홍업씨도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 등으로 잇따라 구속되는 참담한 상황을 맞아야만 했다. 

이 여사는 당시를 남편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보다 더 힘들었던 시기라고 소회하곤 했다. 이 여사는 당시 "내가 죄인"이라며 가슴을 쳤고, 김 전 대통령의 건강은 이때부터 급속히 쇠약해졌다고 한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의 퇴임 후에도 늘 공식석상에 남편과 함께 했다. 2007년 재보선과 2008년 18대 총선에서 전남 무안·신안 지역에 출마한 차남 홍업씨를 위해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휠체어 투혼'을 발휘하며 지원유세에 나서기도 했다. 

이런 이 여사에 대한 김 전 대통령의 무한한 애정과 신뢰는 당연했다. 김 전 대통령이 생전에 동교동 자택 대문에는 '김대중' '이희호'라고 쓰인 문패를 나란히 걸었는데, 김 전 대통령은 자서전 '나의 삶 나의 길'에서 "문패는 아내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발로다. 이 문패를 대할 때마다 아내에 대한 동지의식이 무럭무럭 자라났다"고 적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다른 저서 '내가 사랑한 여성'에서 "내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바로 아내와의 헤어짐이 너무도 아쉽고 슬프기 때문일 것입니다"라는 말로 이 여사를 향한 무한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 여사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할 때까지 37일간 병상을 지키면서 지극정성으로 김 전 대통령을 간병했고, 줄줄이 찾아온 문병객들을 항상 정성스럽게 맞이했다. 

특히 투병 중인 김 전 대통령의 혈압이 떨어지자 한 땀 한 땀 손수 뜬 이른바 '눈물의 털 장갑·양말'을 남편의 손과 발에 끼워줘 주변 사람들의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이 여사는 지난 1970년대 김 전 대통령이 옥고를 치를 때부터 목도리와 장갑을 떠서 마음을 전했다고 한다. 

이 여사는 지난 2009년 8월 김 전 대통령의 입관식에서 생의 반려자이자 동지로 47년간 함께 했던 김 전 대통령을 떠올리며 "너무 쓰리고 아픈 고난의 생을 잘도 참고 견딘 당신을 나는 참으로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자랑스럽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안겨 보내 이를 지켜본 국민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홀로 남았지만, 민주진영의 대모로서 당시 야권이 어려울 때 지원군으로서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민주진보진영이 분열할 때는 김 전 대통령의 유훈인 통합을 강조했고, 이명박-박근혜 정부 들어 남북관계가 얼어붙을 때는 "햇볕정책을 계속해야 한다"며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이 여사는 생전에 2000년 6·15 남북정상 회담 때와 2011년 12월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 조문, 2015년 8월 북한 어린이들에게 모자와 장갑 등 물품 전달 등 3차례의 방북을 하기도 했다. 

이 여사는 생전 언론 인터뷰를 통해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고 높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한길을 걸었다는 것을 기억해주었으면 한다"고 소원했다.  

다만 말년에는 노환으로 몸이 많이 좋아지지 않아 대외 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다. 진보진영이 정권 교체에 성공했지만 이 여사의 몸은 갈수록 안 좋아지면서 병원 신세를 지는 시간이 길어졌다.

이 여사의 몸이 야위고 활동이 줄면서 김 전 대통령의 가신그룹이던 동교동계가 흩어지는 모습도 목도해야 했다. 이 여사가 별세함에 따라 김 전 대통령 서거 이후에도 명맥을 이어왔던 '동교동 시대'도 완전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